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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잊는다는 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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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삐 흘러가는 태양계의 행성과는 달리, 일개 위성의 삶은 무료할 수밖에 없다. 가장 큰 것도 아니고, 특별한 점이 있는 것도 아니라, 해왕성계에 살아가지만, 여느 위성처럼 거의 잊힌 채로 일상을 보내는, 네레이드에서의 삶. 하지만 지금의 생활에 나는 어느 정도 만족하고 있다. 누구의 간섭도, 별다른 위협도, 귀찮은 일거리도 없이. 그렇게 매일 조용히, 흘러가도록 두는 무관심에 가까운 방치. 나는 그게 지루해 견딜 수가 없었다. 산처럼 쌓여있는 상자 속 술병은, 아득한 시간 동안 질리도록 입에 털어 넣어 습관이 된 지 오래라, 당연하다는 듯한 행위에서 아무런 의미도, 재미도 찾지 못했다. 이따금 다른 위성을 만나 함께 한다고는 해도, 결국 지나면 금방 잊혀질 대화뿐이다. 

 

 아무런 특이점 없이 흘러가는 나의 성(星)생이 아까운 것도 있지만, 단지 즐길 거리가 필요하다는 이유에서, 나는 잠시 네레이드를 비우기로 했다. 어차피 할 일도 없는데, 짧은 여행 정도야 내 자유 아니겠는가? 

 

 즉흥적으로, 평소와 같이 바닥에 철썩 붙어 누워있다 문득 스쳐 간 생각에 결정한 여행이지만, 나는 꽤 들떠 있었던 것 같다. 오죽하면 내가 손에 꼭 붙들고 있던 술병을 놓았을까. 그 정도면 이미 말 다 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조금 들뜬 마음으로 간단한 짐을 챙겼다. 일단 술, 그리고 술. 대충 캐리어에 쑤셔 넣고 보니, 그렇게 완벽할 수가 없었다. 마지막으로는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나와 똑 닮은 인형_내 평소 행동을 따라 하도록 설계된_을 신력으로 만들었다. 그렇게 나는, 망설임 없이 해왕성계를 벗어나, 태양계를 넘어서, 어딘지 모를 곳에 도착했다. 애초에 아무런 계획도, 목적지도 없었기에 그저 발 닿는 대로 향했던 거다. 이곳의 명칭 정도야 지나가던 천체주에게 물어 알아냈지만, 그리 익숙한 곳은 아니라 금세 까먹었다. 아무렴 어떤가, 싶은 마음에, 대충 전망 좋은 곳에_그리 말해도 그곳엔 평범한 천체 몇 개와 파편 따위 뿐이었다_자리 잡아 캐리어를 열었다. 모두 같은 종류의, 잘록한 병에 띠 하나 둘린 외관의 술병이 아무렇게나 늘어져 있었고, 나는 그중 하나를 꺼내고는 다시 캐리어를 닫았다. 은색의 여행가방은 꽤 많은 양의 물건_대개가 술이지만_이 들어차 있는데도 무리없이 잠겼다. 

 

 나는 잠시, 어쩌면 오랫동안 같은 자리에 앉아 주변에 술병을 하나둘 채워나갔다. 술기운에 기분이 조금 달아오를 때쯤, 나는 아무렇게나 떠다니는 술병을 집어넣은 뒤 일어섰다. 스텝이 조금 꼬이긴 했지만, 그렇게 취한 것도 아니라 개의치 않고 주위를 거닐었다. 유명한 관광지도, 소문난 별자리도 아니었지만, 나는 단지 새로운 곳에 있다는 것만으로 그간의 무료함을 모두 날려버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끈다는 표현이 맞는지도 모를 캐리어를 들고 정처 없이 앞으로 향하다 보니, 어느새 어두운 골목길의 느낌이 나는_물론 우주이기에 골목길 같은 건 없다_곳에 다다랐다. 음산한 분위기에 겁 많은 천체주라면 분명 위축됐겠지만, 나는 겁이라곤 상실한, 인간들의 표현으로는 간을 배밖에 내고도 남을 녀석이라, 거리낄 것 없이 그곳으로 발을 들였다.

 

 

 오래된 기억은 잊힌다고, 순 거짓말이다. 

 나는 한순간도 이 녀석을 잊은 적이 없다. 나와 같은 얼굴, 다만 여섯 개의 흉터만이 다름을 인정하는 그와 이곳에서 만나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건 또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아니면 정말 운명일 뿐인 걸까? 아니면 누군가의 의도였을까. 

 하지만 그런 의문이 지금 상황을 해결하지는 못한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역시 그랬고, 우린 한참이나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듯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긴 침묵을 깨뜨린 건 나였다. 굳이 알지 않아도 되는 것이었지만, 나는 알아야만 했다. 어떤 행동을 하든 상관없지만, 그 모든 일에 책임을 지는 것. 그게 내가 할 일이었다. 이제 그와 나는 완전히 다른 존재였지만, 그 뿌리는 같았다. 당장에 찍어낸 듯한 얼굴이 그걸 설명할 수 있었다. 

 

“네가 왜 여기 있어.”

 

 옛적에 서로 죽고 못 사는 친구였다기엔 소름 끼치도록 냉랭한 목소리였다. 나조차도 내가 그런 어투로, 목소리로 말을 꺼낼 수 있는지 몰랐다. 

 그는 잠시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 입술을 달싹였다. 

 그도 느끼고 있는 거겠지, 내게 가해지는 압박. 우린 어쨌든 간에 하나였기에, 이건 불가항력이었다.

 

 과거의 실수, 그걸 바로잡아야 할 때다.

 

“나는…”

“죽었다고 들었는데.”

 

 마음이 조급해지는 건 사실이다. 아마 방금의 술의 영향도 있겠지. 그의 대답을 기다리기엔 내 머릿속은 너무도 복잡했지만, 나는 애써 몸과 머리를 진정시켰다.

 

 이전과는 달리 능숙하게 사용하는 신력, 우월한 편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최악도 아닌 전투 실력. 신력도, 그 기본적인 염력조차 사용하지 못하는_마치 인간 같은_이를 제압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 당장에라도 그를 도로 회수하고 모든 기억을 먹어치울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에게 손끝 하나 댈 수 없다. 

 나는 못 한다고 주변의 모든 것이 속삭이고 있어서, 움찔 떨리는 손을 부여잡고 숨을 골랐다. 이어질 그의 말을 숨도 쉬지 않은 채 기다렸다.

 

“너와 다르지, 지금의 나는.”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내 반응을 보더니, 다시금 입을 열었다.

 

“네가 그렇게 좋아하는 술도, 나는 잘 못 해.”

 

 캐리어 속 술병이 달그락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아마 주춤거리는 몸이 캐리어를 조금 건드린 것이겠지. 잠시 시선을 은색 여행 가방으로 옮긴 나는, 곧네 그의 말을 경청하기 시작했다.

 

“나도 내 삶을 찾았고. 한때는 너였지만, 지금은 아니지.”

 

 내가 물은 질문에 대한 답은 아니었다. 

 그는 단지 자신과 내가 전혀 다른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확인시키고 싶은 거다. 이따금 내 눈치를 보는 행동이 아주 조금 안쓰럽기도 했다. 그는 그동안 이곳에서, 나를 피했던 거다.

 

 내가 얼마나 큰 실수를 했는지 이제야 깨달았다. 철없던 어린 날 신력을 과도하게 사용해 만들어낸 나와 거의 같은 존재, 하지만 늘 나보다 뒤처졌던 그의 심정을 이제는 이해할 수 있을 거 같았다.

 그래서 나는 모든 것을 바로잡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알고 있다. 

 

 오래된 기억을 버릴 때가 온 것이다. 

 

 말을 끝내고도 여전히 나를 바라보는 그와 시선을 마주쳤다. 그는 잠시 주춤하더니 이내 내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 행동이 참 마음에 들어서, 나는, 그제야 제대로 웃을 수 있었다. 아마 네 웃음도 나와 같겠지만, 그걸 궁금해하기엔 우린 이미 너무 멀리 와버렸고,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비틀어져서, 다시는 합쳐질 수 없다. 점점 먼 곳으로 뻗어 나가는 두 직선을 굳이 막을 필요 없이, 그저 받아들이면 되는 거였다.

 

 나는 말했다.

 

“그래, 잘 살고. 죽지 말고. 다시는 보지 말자.”

 

 그리고 그는, 그 말을 듣고서 안심한 듯… 웃었나?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단지 보고 싶지 않았을 뿐일지도 모르지만, 그런 건 이제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나는 돌아서기 전 물었다.

 

“이름이 뭐지?”

 

“-”

 

 들었는지, 듣지 못했는지도 모를 그의 말. 물어본 채 대답도 듣지 않고 나는 돌아섰다. 저 멀리, 더 멀리. 지나쳤던 모든 길을 되돌아가서 도착한 태양계, 그리고 내가 사는 해왕성계. 마지막으로 네레이드에 닿기까지. 나는 그의 이름을 알 수 없었다.

 

 차라리 모르는 게 나을 때도 있는 법이다. 나는 평생을 잊지 않았던 기억을 억지로 지워내고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다.

 몇억 년 지속한 응어리를 풀어냈음에도 달라진 건 없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의미가 있는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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